아름다운 마을에도 가난은 어김없이

1989년, 아산 생가에서 숙모와 함께...한국형 기업가의 표본으로 불리는 정주영은 1915년 강원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휴전선 북쪽으로 귀속된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210번지가 원적(原籍)이다. 서울에서 다섯 시간쯤 기차를 타고 달리면 금강산의 언저리인 안변역에 닿는다. 왼쪽으로 동해안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송전역이다.

마을 이름처럼 역 구내뿐 아니라 마을 한복판까지도 온통 소나무밭인 이곳은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곳이어서, 당대의 내로라 하는 명사들의 별장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시 한 시간 반쯤을 걸어가면 감나무 숲에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이 나온다. 아산 마을이다.

3ㆍ1운동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15년. 겨울이 이미 시작된 11월 25일, 아버지 정봉식(鄭捧植)과 어머니 한성실(韓成實)의 장남으로 정주영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마을은 그림같이 아름다운 곳이지만, 그 당시 우리 나라 어디를 가도 먹고살기 어려운 형편은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육남일녀 중 장남이었던 정주영의 아버지는 동네에서도 소문난, 부지런한 농사꾼이었다. 그러나 여섯 동생을 차례로 분가시켜야 할 무거운 짐은 부친의 부지런함만으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까지 길쌈과 누에치기, 베짜기 따위의 일들을 쉬지 않고 하며 살림을 거들었다. 그러나 가난의 때는 씻어낼 수 없는 상처처럼 그들을 덮고 있었다.

정주영은 육남이녀 중 장남이었다. 그의 아버지처럼 동생 일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을 짊어졌던 것이다. 요즘 같으면 유치원을 다닐 나이인 여섯 살 무렵, 정주영은 조부가 훈장으로 있는 서당을 다니면서 공부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행복했던 시절도 잠깐, 열살 무렵부터 그는 농사꾼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가장 큰 유산, 근면

일제 시대 전형적인 농가의 풍경어린 정주영은 새벽 4시께면 졸린 눈을 비비며 시오리 길 떨어져 있는 들판으로 아버지를 따라 나서야 했다. 하루 종일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일을 하노라면, 어린 마음에도 이렇게 힘든 것에 비해 소득은 보잘것 없는 농사일만 하며 일생을 보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아버지는 정주영을 일등 농사꾼으로 키워낼 심산이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작은 삿갓을 씌워 데리고 다니면서 사래 긴 조밭 고랑의 김매는 법이며 조 포기포기에 맨손으로 보토(補土)하는 법 등을 가르쳤다.
날이 가물면 물이 없어 애를 태우다 장마가 지면 홍수로 물난리를 겪어야 했던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홍수 끝에 개천에서 감는 미역은 너무나 즐거웠고,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일하다 밭둑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쉴 때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느꼈던 그 상쾌한 행복감을 정주영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머님께서 나무 함지에 이고 나오신 감자밥을 호박 된장찌개로 비벼 먹던 꿀맛 같은 점심과 나무 그늘에서의 짧은 낮잠도 그에게는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는 봄누에 치는 것이 끝나면 농사일을 거들면서 다시 여름누에를 치기 시작하셨다 한다. 집 뜰에 뽕나무가 많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산뽕을 따러 심산계곡을 헤매고 다니셨는데 어린 정주영도 가끔씩 어머님을 따라 산뽕을 따러 다녔다.
정주영은 이렇듯 부지런한 부모 밑에서 자라던 시절을 일생의 가장 은혜로운 교훈으로 생각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가를 있게 한 첫째가는 유산이 바로 근면함이었던 것이다.

  폐결핵에 걸린 줄도 몰라

당시 서당의 모습같은 또래의 동네 다른 아이들이 장난과 놀이로 짧은 하루해를 보내던 시절에, 부지런한 정주영의 아버지는 추석 전날까지도 밭으로 메밀 거두러 가자고 새벽부터 정주영을 깨우곤 했었다.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공부는 어린 정주영에게 잠시나마 농사일의 힘겨움을 가르쳐준 기간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정주영의 보통학교 시절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특히 행복했다. 학교에 가 있는 동안은 힘든 들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버지를 따라 들일로 피곤한 저녁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학교에 가 공부하는 동안만은 힘든 들일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것이 아직 어린 정주영에게는 여간 기쁜 일이 아니었다.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집에 돌아와 책을 펴볼 시간도 없었지만 볼 필요도 없었다. 3년 동안 서당을 다니면서 소학(小學), 대학(大學), 자치통감(資治通鑑), 오언시(五言詩), 칠언시(七言詩)를 다 익힌 그에게 보통학교 공부는 배울 것이 별로 없어서, 학교에 있는 시간이 오히려 노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일제에 의해 가마니 짜기에 동원된 당시 소학생들 겨울철에는 논밭 일도 뜸해져서 눈이 쌓이는 겨울은 소년 정주영에게는 다시없이 좋은 계절이었다. 그러나 그 겨울에도 그의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매일 짚신을 삼으시면서 새끼 꼬는 법을 배우라고 채근하셨고, 아침저녁으로 소여물 끓여 주는 것만은 언제나 그의 일이었다. 그러나 힘든 여름 들일에 비하면 힘도 별로 들지 않고 시간도 넉넉해서 정주영에게는 눈 내리는 겨울이 배경이 된 추억이 남달리 많았다.
그 당시의 아이들은 모두 속옷도 없이 검은 물감을 들인 광목 바지저고리만으로 겨울을 지냈다. 그러면 찬바람에 저고리 앞자락이 젖어 배가 얼어붙곤 했는데, 다 놀고 방에 들어가면 벌겋게 언 배가 녹으면서 근질근질 부어오르곤 하는 것이다.가난이 원인이었는지 열한 살 되던 해의 겨울, 정주영은 몹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찬 눈바람을 맞으면서 지나치게 놀다 감기가 든 것도 모르고 있다가 도졌던 모양인데, 급기야는 기침을 할 때마다 목안에서 핏덩어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학교를 쉬고 여섯 달을 누워 있는 동안 그 튼튼하던 몸이 마른 장작처럼 변해버렸다. 결국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가을학기에야 겨우 등교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성적은 2등이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사업차 처음으로 미국에 갈 일이 생겨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의사가 폐병을 앓은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 병은 앓은 적이 없다는 정주영의 대답에 의사가 보여주는 엑스레이 사진에는 폐를 앓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초근목피의 가난은 운명일까

1931년, 송전소학교 졸업 사진서당을 다니다 들어간 소학교, 그나마 병으로 휴학도 했었기에 소년 정주영은 열다섯 살이 되어서야 소학교를 졸업했다. 학교 공부는 늘 상위권이었지만, 최대의 희망이었던 소학교 선생님이 되는 꿈은 접어야만 했다. 사범학교를 들어가야 선생님이 될 수 있을 터인데, 사범학교에 갈 돈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평생 농사밖에 모르던 아버지의 완강함 앞에서는 언감생심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맏아들이었던 정주영이, 동생들을 분가시킬 책임을 지려면 부지런한 농사꾼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분이셨던 것이다.
소학교 졸업과 동시에 고된 농사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정주영은 평생 이렇게 땅만 파고 살아야 할 앞날이 막막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오늘 씨를 뿌리면 그 다음날 누렇게 익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공상을 하면서 잠들었다가, 다음날이면 싹조차 보이지 않아 실망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농사 외에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제시대의 노동자통천은 전국에서 눈이 제일 많이 오는 고장이었다. 눈이 한번 내리면 1.5미터쯤은 보통인데 눈이 쌓여도 녹기 전에 또 내리니 긴 겨울은 눈 속에 묻혀 별로 하는 일 없이 지내게 된다.
흉년 뒤끝이면 이 눈오는 긴 겨울을 아침에는 밥을 해먹고, 점심은 굶고, 저녁에는 죽을 쑤어 먹고 지내야 했다. 문자 그대로 조반석죽이었다. 낮 동안 배고픈 것을 견뎌내야 하니까 아침에는 밥을 해먹었지만 저녁에는 배고파도 자면 그만이니까 죽을 쑤어 먹는 것이다. 밥이래야 흰 쌀밥이 아니고 조밥인데다가 죽은 대부분 콩죽을 쑤었다. 봄이 되면 양식도 다 떨어져서 그때부터는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농촌이 이렇게 헐벗고 굶주리는 데도 총독부의 압제는 나날이 심해갔다. 그래서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만주로, 북간도로 떠나가는 것이다.

  첫번째 가출

1932년, 동아일보에 실린 연재소설 ‘흙’정주영도 농촌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소년 정주영을 부추긴 것은 가난도 가난이었지만 동네 구장 집에 배달되던 동아일보가 큰 역할을 했다. 신문도 귀하던 시절, 어른들이 돌려가면서 읽은 후 마지막에 얻어 읽는 동아일보에는 춘원 이광수의 『흙』이 연재되고 있었다. 순진하기만 한 시골 소년에게는 그것이 지어낸 소설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매일매일 적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엉뚱하게도 그 주인공처럼 변호사가 되어 도시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소년 정주영이 나중에 서울에 올라온 후엔 독학을 하면서 보통고시에 응시하기도 했었다. 비록 시험에는 떨어졌지만 그때 공부한 법률지식은 오늘날까지, 외국에 나가 계약을 체결하더라도 특별히 법률고문을 데리고 다니지 않아도 될 정도로 큰 도움이 되었다.
1931년, 청진항 공사 관련 동아일보 기사소년 정주영은 구체적인 가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신문에서 청진, 나진 지방에 제철소와 항구를 만드는 공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철도 공사도 벌이고 있다는 기사를 읽기도 했다. 공장이든 공사판이든 찾아가 보자고 마음먹은 정주영은 같은 마을의 지주원이라는 친구와 함께 길을 떠났다. 학교를 정주영보다 먼저 졸업한 지주원은 정주영보다 서너 살이 위였고, 마을에서는 비교적 깬 사람이었다.
음력 7월, 늦여름이라 농사일도 좀 한가해진 때였다. 저녁을 먹고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집을 빠져 나온 두 사람은 각각 47전의 노자를 주머니 깊숙이 간직하고 무작정 산길을 내달렸다. 날이 밝으면 금방 발각이 날 터이니 밤에 떠나서 밤새껏 산길을 따라 되도록 멀리 달아나자는 심산이었다.

  철도 공사판 품팔이

정주영이 첫 번째 가출해 친구와 함께 노숙했던 원산 일대47전의 노자 돈은 비상금으로 간직한 것이었으나 배로는 나흘 거리요, 걸어서는 보름이 걸리는 천리 길인 청진까지 주린 배를 움켜쥐고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간 기착지로 삼은 원산이나마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 일차 목표였다.
통천에서 원산까지는 1백50리 길, 원산에는 전우학이라는 소학교 동창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먼저 편지를 써두었기 때문에 원산에만 도착하면 그 다음에 청진까지는 길이 있겠지 하고 생각되었다. 전우학이란 친구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시계포에서 심부름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 가면 재워주고 먹여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산만 다리 위에서,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주인의 허락을 받고 나온 친구의 행색을 보고 정주영은 낙심하고 말았다.
그의 초라한 몰골로 보아 청진까지의 길에 도움을 얻기는 애당초 무리였던 것이다. 정주영은 이때 처음 도시에서 노숙을 하며 초라한 자신을 돌아보아야 했다. 그때 그는 반드시 성공해 보란 듯이 살겠다는 생각을 반복하며 잠이 들어야 했다.
이튿날 다시 길을 떠나 북으로 올라가던 정주영은 중간에 철도 공사판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두 달 남짓 일을 했을까. 밥집에서 먹고 자면서 손수레로 흙을 나르는 일이었다. 성인들도 힘든 일이었기에, 어린 소년들에게는 더더욱 힘이 부쳤다. 그나마 품삯이 45전인데 밥값이 32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비 오는 날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밥값이 더 많이 밀려 떠날 수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추석 무렵, 수소문 끝에 찾아오신 아버지에게 이끌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번엔 서울로

직원들과 함께 금강산 구룡폭포에서아버지에게 붙들려 고향으로 돌아온 정주영은 여전히 가출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다음해 봄이 되자 다시 동네 친구 두 명과 함께 서울을 향해 집을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간 기착지로 삼았던 친구의 집에서 한 녀석은 붙들려버리고, 둘만이 서울을 향해 길을 떠나게 되었다.
지친 다리를 쉬고 있던 어느 길가에서였다.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한 신사가 다가와서 물었다.
“너희들 어딜 가느냐?”
“공부를 할 요량으로 서울에 가는 길이지요.”
대답을 들은 그 신사의 말인즉, 서울이 아무리 큰 도시지만 사람이 넘쳐나는 곳인데, 촌무지랭이들을 누가 취직을 시켜주겠느냐는 것이다.
자기는 요리사인데 금강산에서 제일 큰 요릿집에 불려가는 길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따라오면 그곳에 취직을 시켜주겠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꽤나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래서 정주영과 친구는 그 신사를 따라가기로 했다.
금화에서 단발령이라는 고개만 넘으면 금강산까지는 하룻 길이었다. 일행 셋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그 신사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 때문에 숙박비 모두를 정주영 일행이 내게 되었다. 그 신사는 겉모습만 멀쩡한 사기꾼이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빈털터리가 되어 다시 서울을 향해 걷기 시작했지만 또다시 아버지에게 붙들려 오고야 말았다. 금화에 있던 둘째 할아버지 댁에 들른 것이 불찰이었다.

  소 판 돈을 훔치다

당시 한국 농촌의 풍경다시 잡혀 왔지만 농촌을 떠나서, 일한 만큼 벌 수 있는 곳을 찾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이번에는 부기학원 속성과에 들어가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이 더해졌을 뿐이다. 평양에 무슨 부기학원이 있는데 속성과 6개월을 졸업하면 취직을 보장한다는 선전문을 아랫동네에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 시골에서는 달걀을 팔아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고, 돼지를 키워서는 시집ㆍ장가보내고, 소를 키워서는 논밭을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주영의 집에서도 소를 키우고 있었다. 정주영의 아버지도 소를 키워 판 돈으로 동생들을 분가시켜왔다. 소는 집안의 가장 큰 재산이었던 것이다.
마침 집에서 기르던 소가 팔려나갈 때였다.
1932년, 경성실천부기학원 원생 모집 광고정주영은 아버지가 궤짝 속에 넣어둔 소 판 돈을 훔쳐 이번에는 기차를 타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평양에 부기학원이 있는데 서울에는 없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서울에 와서 그 돈으로 덕수궁 옆에 있는 부기전수학원에 등록하고 분개(分介)하는 것부터 배우기 시작한 정주영 앞에 20일쯤 지나자 다시 아버지가 나타나셨다. 평양까지 갔다가 허탕을 친 후 ‘서울에 가면 이런 데가 있으니 거기로 가보라’는 평양 부기학원측의 말대로 서울에 와서 정주영을 찾아낸 것이다.
이번에는 죽어도 안 내려가겠다고 버텼지만, 엄하시기만 하던 아버지의 통사정 앞에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 내려온 정주영은 이듬해까지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부지런히 일해서 동생들 세간을 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또 흉년이 들고 말았다. 세끼 밥먹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경일상회의 주인 정주영

인천 부두 부근정주영은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서울에 가서 성공하고 만다는 마음을 먹고 다시 고향을 떠났다. 19살 되던 해 늦은 봄, 오인보라는 친구와 함께 다시 한번 서울행 차를 탔다. 찻삯은 벌어서 갚는다는 조건으로 오인보가 빌려 주었다.
서울까지 온 다음, 객지에서 막일을 할 판인데 둘이 같이 있으면 서로 불편하니 안보는 것이 낫겠다고 합의를 해서 오인보는 서울에 남고 정주영은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부두의 하역 일은 물론이고 막노동 일은 무엇이든 달라붙었다. 그러나 그쪽 노동일도 불안해지자 얼마 후 다시 서울로 올라온 정주영은 여기저기 불안한 막일꾼 노릇을 하던 끝에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비로소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쌀 한가마니 값되는 월급을 받고 세끼 식사는 그 집에서 먹는다는 조건으로 일을 했다.
경일상회가 있던 신당동복흥상회에서 열심히 일을 한 지 3년쯤 된 어느 날, 가게문을 닫겠다고 마음먹은 주인 영감님이 정주영에게 말했다.
“자네는 배달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신용을 얻었으니 그대로 가게를 꾸려가면 어떻겠나?”
정주영의 나이 스물세 살, 경일상회로 이름을 바꾸고 싸전의 주인이 된 것이다. 서울여상 기숙사와 배화여고 기숙사에 쌀을 대면서 조금씩 돈을 벌어나가던 정주영은 황해도 연백 등 쌀 산지에서 쌀을 수집해다가 서울에서 도매와 소매를 겸했다. 이때 경일상회의 수익금으로 고향에 논 30마지기를 살 정도였으니 꽤나 성공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가 쌀의 자유판매를 전면 금지하고 쌀 배급제를 실시하게 되어 경일상회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아도 자동차 서비스 시대 - 자전거에서 자동차로

초창기의 자동차정주영이 세운 대표적인 기업인 현대자동차는 어떻게 출발했을까. 물론 지금은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로 성장한 현대와 설립 당시의 현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정주영이 처음 자동차와 인연을 맺을 때의 정신만큼은 아직도 현대자동차의 기업정신을 이루고 있다.
1940년. 고향을 떠나 정월의 매서운 바람이 휩쓸고 있는 서울 거리로 다시 돌아온 청년 정주영은 일생을 걸 만한 사업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돈도 배경도 거의 없었던 젊은 청년이 일생을 걸 만한 일은 그리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주영은 인생에 전기를 마련해 준 이를 만나게 된다. 이을학(李乙學) 씨였다. 그는 정주영이 일하던 쌀가게의 단골손님이었는데, 서울에서 가장 큰 경성 서비스 공장의 직공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청년시절, 정주영무슨 얘기 끝엔가 그가 지나가는 말로 정주영에게 말을 건넸다.
"아현동에 아도 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이 있는데, 그걸 한번 해보지 그래요?"
그 공장이 최근 매물로 나왔다는 것이다.
"아, 나야 자전거라면 쌀 배달하느라 도사같이 타지만 자동차는 전혀 몰라요."
정주영의 대꾸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자동차 수리 공장이 뭐 그리 어려운 건 아니라오. 돈이 별로 없어도 되지. 그러나 일거리는 아주 많아서 돈 벌기가 그만큼 좋은 것도 없을 게요. 만일 당신이 그 공장을 한다면 내가 직공들도 모아드리리다."
그의 말에 귀가 솔깃했으나, 아무리 적은 돈이라 하더라도 남의 공장을 인수할 만한 돈이 없었던 정주영은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우며 생각에 잠겼다. 3천5백 원이라는 거금을 어떻게 마련한다는 말인가.
그때 정주영의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삼창정미소의 오윤근 씨였다.
정주영은 이씨와 함께 오윤근 씨를 찾아갔다. 그는 정주영이 쌀가게를 할 때 쌀을 대주던 사람인데, 사채놀이도 하는 사람이었다. 정주영의 설명을 들은 그는, 선듯 3천원이라는 거금을 신용만으로 빌려주었다. 쌀가게를 하면서 쌓았던 정주영의 신용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 3천 원에 이을학 씨가 3백 원, 그의 경성서비스 동료 김명현 씨가 2백 원을 빌려 주었고, 정주영이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돈에다가 고향 친구 오인보에게서 빌린 5백 원을 더해 총 5천 원을 가지고 ‘아도서비스’를 계약했다.

  한달 만에 다시 알거지

현대자동차공업사 초창기의 모습거리에는 아직 찬바람이 휘몰아쳤지만, 정주영의 가슴에는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계약금을 치르자마자 공장을 인수한 청년 정주영은 밀려드는 일감을 처리하느라 신바람이 났다. 강원도 산골의 가난한 소년이 종업원을 둔 어엿한 공장의 주인이 된 것이다. 이을학의 말대로 일감도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일본 질소광업의 트럭 두 대, 임진강에 빠졌던 개인 트럭 한 대, 당시 세도가 윤덕영의 올즈모빌 한 대, 또 다른 트럭 두 대… 이렇게 매일매일 밀려드는 자동차를 아현동 언덕길가에 세워둔 채 고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장을 시작하고 한달도 채 지나기 전, 첫번째 시련이 들이닥쳤다. 공장의 잔금을 치르고 방심해서였을까. 화재가 난 것이다.
자동차 수리라고는 전혀 모르던 정주영이 자동차 수리공장을 시작했으니, 배워야 할 것이 무척 많았다. 정주영이 하는 일이라고는 손님들 앞에서 기세 좋게 인사를 건네고 왔다갔다하던 게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그는 얼른 기술을 익히고 싶었다. 그래서 직공들을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악착같이 배웠던 것인데, 그런 배우겠다는 열정이 그만 화를 부른 것이다.
그날도 기술자 두 명과 함께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면서 도색 일을 배우고 있었다. 밤이 너무 깊은 시간이라 기술자들이 퇴근한 후, 혼자 숙직실에서 잠을 자던 정주영은 여느 때와 같이 새벽에 눈을 떴다. 그리고 세수할 물을 데우려고 화덕에 신나통을 조금 기울여 부었다. 그 순간 불길이 화악 신나통에 옮겨 붙었다. 손에 들고 있던 신나통에 불이 옮겨 붙으니 본능적으로 그 통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고, 불은 순식간에 낡은 목조 건물로 번져나갔다.
다급해진 정주영은 드센 불길을 피해 겨우 건물 밖으로 빠져나와서 목숨을 건졌지만, 수리를 끝낸 트럭 다섯 대와 올즈모빌 승용차까지 몽땅 태웠으니 좌절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용산 경찰서에 잡혀가서 조사를 받은 끝에 고의성이 없는 실화로 판정이 나서 겨우 풀려나자 이제는 앞길이 막막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 앞에서 견디기가 힘들었겠지만 청년 정주영의 뚝심은 그대로 주저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주영은 다시 삼창정미소의 오윤근 씨를 찾아갔다.
“뜻하지 않은 화재를 만나 몽땅 다 날리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는데, 이대로 꺾이고 나면 먼저 빌려간 영감님 돈 3천 원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한번만 더 도와주셔서 영감님 빚을 갚게 해주십시오.”
낭떠러지에 매달린 절박한 심정으로 꿇어앉아 사정하고 사정했다. 가만히 정주영을 건너다보던 오윤근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나는 이날까지 단 한 번도 담보를 잡고 돈을 빌려준 적이 없어. 신용만을 보고 빌려주지. 그런데 신용만 보고 빌려준 돈을 떼인 기록도 없는 사람이야. 그게 내 자랑이지. 내 평생에 사람 잘못 봐서 돈 떼었다는 오점(汚點)을 찍기는 나도 싫네.”

  신설동 시대

1976년, 최초의 국산 자동차 포니그렇게 해서 얻은 빚 3천5백 원으로 신설동 빈터에다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자동차 수리 공장의 허가가 자동차 제조 공장에만 주어졌기 때문에 자동차 수리 공장 허가를 얻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기에, 무허가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갚아야 할 빚은 산더미 같았고, 무허가로 하는 일이었으니 매일매일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관할인 동대문경찰서에서는 매일같이 순경이 찾아와 당장 공장 문을 닫지 않으면 잡아넣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정주영은 공장 일에 매달리는 한편, 새벽마다 일본인이었던 동대문 경찰서 보안계장의 집을 찾아갔다.
제대로 상대도 해주지 않는 박대를 받아가면서 그렇게 한달을 쫓아다닌 끝에 보안계장이 드디어 정주영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손들었다. 내 업무상 당신을 구속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매일 아침 이렇게 찾아오는 정성이 지극해서 구속은 하지 않겠다. 그래도 법을 어기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위법을 해도 우리 체면을 생각해서 영리하게 해라.”
보안계장은 우선 대로변에서 공장이 안 보이도록 판자로 울타리를 치고, 숨어서 하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충고했다.
한달을 매일같이 찾아다닌 정주영의 근성이 얻어낸 결과였다.
그 당시 자동차 수리 공장들은 아무것도 아닌 고장도 큰 고장인 것처럼 수리 기간을 길게 잡아 수리비 명목으로 바가지를 씌우곤 하였다. 정주영은 다른 공장에서 열흘 걸린다는 수리 기간을 사흘쯤으로 단축해서 높은 수리비를 청구하는 방법을 썼다. 자동차를 쓰는 사람은 빨리 고쳐지는 게 반갑지 수리비가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신설동의 무허가 공장으로 고장난 차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신설동의 ‘아도서비스’ 공장은 정신없이 밀려드는 일감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면서 돈도 꽤 많이 벌어들였다. 오윤근 씨에게는 빌린 돈은 물론 이자까지 깨끗이 다 갚아서 그분 일생에 ‘사람 잘못 보아 돈 떼어먹혔다’는 오점은 남기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휘몰아치던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 한 정주영은 다시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게 된다.

  전화위복

1940년대, 진남포 항구 일대정주영이 새로 시작한 일은 운수업이었다. 황해도 수안군에 있는 홀동금광의 광석을 평남 진남포 제련소로 운반하는 일이었다. 자동차 수리 공장에서 홀동금광 소장 차를 고쳐 줬던 인연으로 당시 식산은행 총재 아들이 경영하던 보광광업 주식회사와 하청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
회사에 보증금 3만 원을 걸고 새 트럭 스무 대, 헌 트럭 열 대를 사서, 엔진 소리만 듣고도 차가 어떻게 아픈가를 아는 김영주에게 정비 책임을 맡겨 일을 시작했다.
험난한 산악지대를 오가는 일이라, 잦은 자동차 고장으로 하루 한 번 왕복도 어려웠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은 광업소 소장측의 말도 안 되는 트집이었다. 많이 실었다, 적게 실었다, 왜 금덩이 못잖은 광석을 흘리고 다니느냐, 시시콜콜 끊임없는 잔소리를 해댈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뒤집어엎고 싶었다.
1945년,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본외상그러나 징용에 끌려나가지 않으려면 ‘나 죽었소’하고 참아야만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광석 운송 사업을 하려는 동기생을 끌어들이기 위한 고의적인 생트집이었다.
일이 아닌 사람에게 시달리던 정주영은 3년 간의 일을 끝내게 된다. 1945년 5월, 그 소장 동기생한테 트럭을 인수시킨다는 조건 아래 하청 계약을 넘기고, 계약 보증금과 그동안 벌어 모은 5만여 원을 찾아 가족 전부를 데리고 홀동광산을 떠났다.
그것이 전화위복이었다. 그로부터 딱 3개월 후에, 일본이 패망했던 것이다. 종전과 더불어 홀동광산은 폐광이 되고 거기 있던 일본인은 모두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3개월만 더 머물러 있었더라면 그동안 번 5만여 원의 돈을 날리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처럼 시베리아로 끌려갔을 것이다.

  자동차와 건설업의 시작

현대자동차공업사 직원들과 함께홀동광산에서 손을 털었던 1945년 5월부터 이듬해 4월,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 간판을 걸기까지 만 1년 동안은 정주영의 인생에서 유일한 무직(無職) 기간이었다. 그때 정주영은 신설동에서 자동차 수리 공장을 할 때 샀던 돈암동의 자그마한 기와집에서 스무 식구가 같이 살았다. 해방 직후의 서울은 광복의 기쁨도 잠시,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저마다 제각각의 목소리로 주의주장을 펼치기에 여념이 없었고, 임시정부도 수립되기 전이라 미군정 치하에 놓여 있었다.
미군정청은 일제시대의 재산을 민간인들에게 불하해 주었는데, 중구 초동 106번지의 적산 대지를 불하받은 정주영은 1946년 4월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걸고, 그때는 매제가 되어 있던 김영주와 홀동광산에서 사귄 친구 최기호, 고향 친구 오인보와 같이 자동차 수리공장을 다시 시작했다.

이때 내건 간판이 ‘현대자동차공업사’였는데, ‘현대’를 지향해서 발전된 미래를 살아보자는 의도에서였다.
처음에는 미국 병기창에 가서 엔진을 바꾸어 다는 일 따위를 맡아 하던 정주영은 점차 고물 일제 차를 개조하는 일에도 손을 댔다. 1톤 반짜리 트럭의 차체 중간 부분을 잘라 이어 2톤 반짜리 트럭을 만드는 것이다.
자동차 수리 공장은 자동차 수리 청부업이었기 때문에 수리 견적을 내서 계약으로 일을 하고 한꺼번에 관청에 가서 수리 대금을 받곤 했다.

어느 날 자동차 수리 대금을 받으러 관청에 갔다가 건설업자들이 공사비 받아 가는 것을 본 정주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동차 수리로 받은 돈은 몇 백원인데, 건설업자들이 받아 가는 돈은 몇 만원이었던 것이다.
당장에 초동‘현대자동차공업사’건물 안에 ‘현대토건사’간판을 하나 더 걸고 정주영은 건설업을 시작했다. 1947년 5월 25일이었다.
친구 오인보와 매제 김영주마저, 경험도 자본도 없이 까딱하면 망하기 첩경인 무모한 짓이라고 극구 말렸던 토건업 진출은 정주영이 주위에서 처음으로 무모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토건업이 전혀 생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토목 공사판에서 노동한 경험도 있었고 또 당시 토건업이 그리 큰 기술을 가져야 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견적 넣어 계약하고 수리해 주고 돈 받기는 자동차 사업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토건업계는 미국 시설 관계 공사가 대량으로 발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소위 일류 업자 15명 외에는 3천여 개가 넘는 군소 업자들이 난립해 치열한 수주 경쟁을 해야만 했다.
공업학교 교사 출신을 유일한 기술자로 두고 기능공 10여 명을 데리고 다니면서 정주영은 미군정청 관리들과 인사를 트고 교제를 열어 첫해에 1천5백30만 원의 계약고를 기록했다. 1948년, 자동차공업사와 같이 쓰던 현대토건사는 사무실을 광화문 평화신문사 빌딩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수주경쟁에 뛰어들었다.


  피난길에서

1ㆍ4 후퇴1950년 1월, 정주영은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 사옥을 필동으로 옮겨 현대건설주식회사로 의욕에 찬 새 출발을 했다. 그러나 그 반년 후 6ㆍ25동란이 터졌다. 또다시 아수라장이었다. 전쟁의 와중에 회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6월 26일. 벌써 시내 곳곳에 괴뢰군들이 들어와 있었다. 대가족을 모두 이끌고 길을 떠날 수가 없었던 정주영은 아우인 정인영만을 데리고 일단 피난길에 올랐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정인영을 서울에 그대로 두었다가는 낭패를 당할 것 같아서였다.
을지로를 지나 한강쪽으로 빠져나갔다. 길거리에는 이미 피난민의 대열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한강 다리는 이미 끊긴 후였으나, 어떻게든 한강을 건너야만 했다. 간밤에 내린 비로 한강 물은 더욱 불어나 있었다.
그 와중에도 돈벌이에 여념이 없는 사람이 있었다. 한강에서는 작은 조각배 하나로 사람을 두셋씩 태워 강을 건네 주고 돈벌이를 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밀리기만 하는 피난민의 대열에 지치고 짜증이 났던지 그 사람은 보트를 백사장에 올려놓고는 노만 훌쩍 들고 사라져 버렸다. 아마 노가 없으면 보트는 안전하겠지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정주영은 동행했던 서비스 공장 직원 최기호와 정인영과 함께 한꺼번에 달려들어 그 보트를 강물에 밀어 넣고 올라탔다. 두 손만으로 물살을 헤치며 다다른 곳은 반포쪽 한강 기슭, 어쨌든 한강은 건넌 셈이었다. 거기서부터 수원까지는 걷는 수밖에 없었다. 수원에서는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를 얻어 타고 천안까지 내려갔다. 여기서 국군의 진격 소식을 듣고는 다시 노량진까지 걸어서 올라갔다가, 다시 천안까지 되돌아오는 고달픈 피난행렬을 계속했다.
천안에서 다시 걸어서 내려간 곳이 대전, 이곳에서 마지막 남행열차를 간신히 얻어 타고는 대구로 향했다.

  고달픈 피난생활

6ㆍ25 전쟁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다행히 동생 정인영이 동아일보 기자였던 터라 대한일보에서 편집 일을 하게 되었다. 정주영은 일선 정훈부대로의 신문 배달을 자청했다. 교통편이 제대로 있을 리 없어 배달하는 일은 거의 걸어서 해야 했지만 날마다 산중 일선 부대에까지 열심히 신문을 날랐다.
그러던 어느 날, 배달할 신문을 가지러 배본소로 가보니 신문이 한 부도 없었다. 신문 배본 책임자가 두부가게에 돈을 받고 몽땅 팔아 넘겼던 것이다. 일선에서는 그것도 소식이라고 눈이 빠지게 기다릴 텐데 말이다. 전쟁의 상황도 긴박하게 돌아갔다. 추풍령 저지선이 무너져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정주영은 다시 동생과 함께 낙동강을 건너기로 했다.
비교적 수심이 얕은 곳을 골라 맨몸으로 헤엄을 쳐서 낙동강을 건넌 정주영은 다시 부산까지 걸어서 내려갔다. 무슨 일을 해도 풀칠하기 힘든 나날이었다. 그러던 중 정훈감실에서 알았던 육군 대위를 만났는데, 그가 주민들에게 홍보하는 일을 하자고 제의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정주영과 정인영은 조그만 배 하나를 타고서는 이섬 저섬을 돌아다니며 해안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했다.
“괴뢰군은 잠깐이다. 곧 미군이 들어온다.”
거제도(巨濟島)에는 특히 대학교수들이 많이 피난을 와 있었다. 최고 식자층인 대학교수들을 앞에 놓고 연설을 하면서 정주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남해안을 따라 목포에 도착한 정주영은 여기서 끔직한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 정주영과 함께 주민 선무활동을 하던 대위가 마침 멸치를 말리던 어부에게 다짜고짜 그 멸치를 배에 몽땅 실으라고 명령을 하는 것이었다. 어부가 조금만 남겨놓고 가져가 달라고 사정을 했건만 대위는 인정사정 없이 어부를 두들겨 패고 기어이 멸치를 빼앗아 실었다. 그것으로 그 대위와도 결별을 하고 만 정주영은 다시 부산 거리를 쏘다니며 일거리를 찾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여름이 한창 뜨거운 폭염을 퍼붓고 있었던 7월, 정주영은 일거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민주당 사무실로 들어갔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모두 웃통을 벗고 앉아 맥주를 마시며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정주영은 기가 막혔다. 아무것도 아닌 보통사람들은 작은 애국이라도 한답시고 일선 부대로 신문 배달도 하고, 배멀미에 시달리면서도 섬마다 돌아다니며 목청을 돋구고 있는데, 전쟁 중에 맥주 마시며 바둑 두고 있는 그 정치가들에게서 환멸을 느꼈던 것이다.

  부산 시절

광복 후의 부산 거리 풍경옷은 서울서부터 입고 왔던 노동복 단벌에 돈은 무일푼, 정주영은 거지 중에 상거지였다.
어느 날, 굶주림에 지친 정주영은 동생과 함께 전당포를 찾았다. 수중에 돈이라고는 한푼도 없이 배를 곯을 형편이었던 것이다. 정주영이 차고 있던 시계라도 전당을 잡히고 밥을 사먹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당포 주인이 부르는 값은 형편없었다. 그대로 발길을 돌려 나오는데 길거리에 사람을 뽑는 구인 광고가 붙어 있었다. 미군부대에서 통역을 모집한다는 광고였다.
“형님, 손목시계는 일단 차고 계세요, 통역으로 취직을 하면 미군 식당에서 빵부스러기를 가져오기만 해도 먹는 것은 해결될 겁니다.”
정인영의 말대로 신문기자였다는 말에 호감을 느꼈는지 정인영은 미군부대에 취직이 되었고, 통역을 보내달라는 부서가 줄을 서고 있던 형편이라 정인영은 공병대의 통역을 맡을 수 있었다.

어떻게 공사라도 해서 밥을 먹어야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공병대 책임자인 매카리스트 중위는 통역인 정인영에게 건설업자의 선정을 의뢰했고, 정인영은 곧바로 정주영을 불러들였다. 임시 수도이자 최후 전략 교두보인 부산은 군수 물자 집하지이기도 했고 군사 지원 사령부도 있었다.
한꺼번에 밀려드는 미군 병사 10만 명의 하룻밤 숙소를 만드는 일이 정주영에게 떨어졌다. 학교 교실을 소독하고 페인트칠을 한 다음, 맨바닥에 널빤지를 깔고 그 위에 천막을 치면 임시숙소가 만들어졌다. 매일 3시간 이상 눈을 붙여본 일이 없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한 달쯤을 일을 하고 나니 돈이 커다란 가방에 가득했다.

미군으로부터 표창을 받는 정주영미군 공사는 전선을 쫓아다녀야 했다. 그래서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정주영은 선발대로 미군 군용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매카리스트 중위는 미군을 따라 평양(平壤)까지 갔지만 정주영은 가족들의 안부가 걱정스러워 서울에 남았다. 집으로 돌아가 보니 그동안 돈암동 집은 북한군에게 빼앗겼고, 쫓겨난 가족들은 경기도 여주에 있던 정인영의 처갓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청렴결백해서 기껏해야 댄스 파티 초대밖에는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오늘날 현대의 성공에 큰 힘이 되었던 매카리스트 중위는 한국에서 대위가 되어 귀국했다. 그리고 한참 후 육군 소령이 되어 다시 한국에 배치되었다가 중령으로 영구 귀국했다.

그가 퇴역한 후에도 어려웠던 6.25 시절을 잊지 않았던 정주영은 그가 전역한 후 미국 휴스톤 지점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매카리스트 중위는 후에 ‘자신이 정주영을 만난 것은 우연이며 그 뒤에도 계속 그에게 일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은 정주영의 일 솜씨가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해서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으며 그의 깔끔한 일 처리 때문에 자신도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 뒤에 부부 초청으로 두 어번 한국을 다녀간 그에 대해 정주영 역시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아이젠하워 방한과 “원더풀!”

폐허로 변한 서울의 거리1952년 12월 추운 혹한기, 새로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선거공약을 실천하는 차원에서 전쟁을 치르는 한국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미8군 관계자들은 걱정에 빠졌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는 미국의 대통령이 묵을 만한 숙소조차 없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운현궁을 임시 숙소로 쓰기로 결정은 했는데, 그것도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화장실과 보일러 난방시설이 없는 것이 가장 문제가 되었다. 기간이 15일 밖에 없었기 때문에 운현궁 방안에 화장실을 만들고, 실내 난방시설을 설치하는 공사는 더더욱 어려웠다.
그 공사는 정주영에게 떨어졌다. 정주영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15일. 게다가 양변기라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정주영이었다.

공사를 기일 내에 제대로 해놓으면 미군이 공사비 갑절의 보너스를 따로 내기로 하고, 반대로 기일 내에 제대로 못 마치면 갑절로 벌금을 내는 것으로 합의를 본 후, 정주영은 일꾼들을 끌고 용산쪽을 훑기 시작했다.

전쟁의 상처피난으로 비어 있는 고물상들을 하나하나 뒤지며 보일러통, 파이프, 세면대, 욕조, 양변기들을 실어왔다. 아무개가 언제 무엇을 얼마만큼 갖고 갔으니 어디어디로 물건값 받으러 오라는 인출증 같은 것만 하나씩 써붙여두고 가져간 자재들로 우선 공사를 시작했다. 하루 스물네 시간씩 꼬박 들러붙은 끝에 열흘 만에 공사는 끝이 났다. 그런데 보일러를 시운전해 보니 기가 막혔다. 보일러의 라디에이터를 비롯한 모든 연결점에서 증기가 새어나와 순식간에 실내 전체가 온통 뿌옇게 변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이틀을 철야작업한 끝에 완전무결한 공사를 마무리지을 수가 있었다.
약속 시한 사흘 전에 공사 마무리를 하고 공사비를 받으러 간 정주영을 보고 미군들은 손을 치켜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현다이 넘버원!”

평소 신임을 받아 온 정주영에게 맡겨진 이 일은 짧은 기간과 공사의 힘겨움에도 비교적 잘 마무리되어 그 후 미군 관련 공사를 정주영이 거의 도맡다시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잔디 대신 보리라도

맥칼리스터 미군 공병 장교, 아우 정인영 등과 함께 유엔군 묘지 조성공사는 정주영과 현대의 기지를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로 손꼽힌다.
운현궁 공사로 미군의 신뢰를 전폭적으로 받았던 정주영에게 이번에는 참으로 기발한 공사 제의가 들어왔다. 부산의 유엔군 묘지를 새파란 잔디로 덮어달라는 것이었다.
때는 풀 포기가 다 말라비틀어진 한겨울이었다. 유엔군 묘지는 한창 조성 중이던 터라 흙바닥 그대로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한 곳을 한국전에 출병한 각국 유엔 사절들이 내한해 참배할 계획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8군 사령부는 정주영이라면 이 일도 해낼 수 있으리라 여겼던지 이 일을 맡긴 것이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제의를 받고 참배 날짜까지는 닷새밖에 없었다. 일이라면 무조건 달려들고 보는 정주영이라 해도 이번 일은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정주영의 기지가 발휘된 것이 바로 이때다.

‘미군이 요구하는 것은 잔디가 아니다, 파란풀이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다면 참배객들이 둘러보는 동안 파란풀만 눈에 들어오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정주영은 아이디어비를 포함해 실제 공사비의 세 배를 요구했다. 돈이 문제겠는가. 당장 계약을 체결한 유엔군측에선 정주영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계약을 맺자마자 정주영은 사방에서 트럭을 끌어 모았다. 이렇게 마련된 30대의 트럭을 끌고 정주영이 간 곳은 낙동강 가의 보리밭이었다.
한겨울에도 파릇파릇하게 남아 있는 건 보리밖에 없었다. 시골에서 자란 정주영이 보리를 떠올린 건 참으로 기막힌 발상이었다. 그 주변의 보리밭을 몽땅 구입한 정주영은 흙과 함께 보리들을 트럭으로 실어 날랐다.
미국 관계자들은 “원더풀, 원더풀, 굿 아이디어!” 를 외치며 눈을 휘둥그레 크게 뜨고 감탄했다.
이렇게 해서 미8군 공사는 시쳇말로 ‘손가락질만 하면’ 모두 정주영의 몫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참담한 시련 - 고령교 건설공사

고령교 공사 장면1954년 4월, 정주영은 크나큰 시련을 맞게 되었다. 조폐공사에서 발주한 동래의 건설현장과 함께 시작된 고령교 복구 공사에서 엄청난 적자를 기록, 현대건설은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고령교는 대구와 거창을 잇는 교량으로 지리산(智異山) 공비 토벌을 위해 복구가 시급한 처지였고, 그때까지의 정부 발주 공사로는 최대 규모였다.
처음에 정주영은 이 공사에 큰 기대를 걸었었다.
그러나 공사는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교각은 기초만 남아 있고, 파괴된 상부 구조물이 그대로 물에 잠겨 있어 말이 복구 공사지 오히려 신축 공사가 더 쉬울 판이었다. 게다가 투입할 수 있는 장비라고는 20톤짜리 크레인 한 대, 믹서기 한 대, 콤프레셔 한 대가 전부였다. 그나마 대부분 인력에 의지한 원시적인 공사로 세워놓았던 교각이 홍수에 쓸려 사라지기도 했다. 결국 착공 후 1년이 지나도록 교각 한 개도 다 박아 넣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물가는 120배로 엄청나게 올라버렸다. 어쨌든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조폐공사 동래 사무실과 건조실 공사는 7천만환의 막대한 적자를 보고 완공되었다. 미군 공사에서 알뜰하게 벌어 모은 돈을 조폐공사에 다 털어 넣다시피 해 완공한 것이다.
회사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공사장에서는 인부들이 ‘임금을 내놓으라’ 파업을 하고 가뜩이나 부진한 공사는 지지부진, 하루하루 지연되었다.
신용이 사업하는 사람의 재산이라고 생각한 정주영은 어차피 손해를 보는 일, 공사만이라도 계약기간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리저리 자금 조달을 위해 뛰어다녔다. 최대한의 힘을 동원한 결과, 남의 돈을 끌어들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생들과 최기호, 매제 김영주의 집까지 처분하기로 뜻을 모았다. 조상 차례 지낼 집 한 칸은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정주영은 집 대신 초동 자동차 수리 공장 자리를 내놓았다.
그동안 물가가 엄청나게 뛰었기 때문에 가족들의 집을 팔고도 모잘라, 얻을 수 있는 빚을 다 끌어 모아야 했는데, 그 이자가 월 18퍼센트나 되어 1년이면 쓴 돈의 꼭 배를 이자로 내야 했다.
55년 5월 마침내 악몽의 고령교는 최악의 상황 속에 당초 계약 공기보다 2개월 늦게 완공되었다. 계약 금액 5천4백78만 환보다 많은 6천5백여만 환의 엄청난 적자를 보고서였다. 공사가 끝난 뒤에는 현장 장비를 철수시킬 기력도 없는 지경이었다.
빚쟁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동종업자들의 시기와 질시도 더욱 극심해졌다. 소학교밖에 안 나온 정주영이 공기가 2년이나 되는 장기 공사를 수주하면서 인플레 계산을 빼고 일괄 계약을 한 것이 실수라느니, 그 학력으로 인플레가 무엇인지나 알겠느냐느니 하는 개인적인 비난도 들어야만 했다.
정주영은 그러나 이런 비난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경험 부족으로, 우리나라의 형편없이 부실한 건설 장비로는 고령교 정도의 공사도 힘겹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실책이었다. 귀중한 경험을 한 셈이지만, 이때 얻은 빚을 갚는 데는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6대 건설업체로 발돋움

재건 중인 인도교1957년 9월, 현대가 한강 인도교 공사를 따낸 것은 우리나라 건설업계의 커다란 이슈였다.
당시 역사가 깊은 조흥토건과 흥화공작소의 수주 경쟁은 너무나 치열했다. 누구도 양보하지 않아 조정이 안 된 채 예산 집행이 1년이나 연기되고도 타협점을 못 찾는 바람에, 결국 경쟁입찰에 붙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화공작소가 당시 시내에서 한강까지의 택시 요금 4천 원의 4분의 1 가격인 단돈 1천 원에 응찰하면서 기부 공사를 하겠다고 나왔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입찰서를 뜯은 내무장관이 흥화공작소는 입찰 의사가 없는 것 같으며, 기부 공사도 받을 수 없다고 공식 발언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응찰 가격 두 번째였던 현대건설로 자동 낙찰이 되었다.
이 공사에서 40퍼센트의 이익을 거둔 현대는, 고령교 복구 공사의 악몽에서 벗어나 건설업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를 마련했다.
1957년, 현대건설에 의해 다시 개통된 한강 인도교단일공사로는 전후 최대 규모인 이 공사를 성공리에 마무리하기 위해 정주영이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장비 문제였다. 고령교 공사로 인한 막대한 적자의 뼈아픈 원인을 되새겼던 것이다. 다행히 현대건설은 국내 건설업체 중 유일하게 미8군 장비 불하처에 등록된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때는 건설업자들이 미군부대와 직접 접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중간 상인들을 통해서 비싸고 결점 많은 장비를 사서 써야 했던 시절이었다.
미군 발주 공사는 전시 중의 긴급 복구 공사와는 달리 엄격한 제한들을 지켜야만 했다. 또 앞으로의 추세로 보나 쓰디쓴 경험으로 보나 장비 확보에 현대 건설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정주영은 생각했다.
정주영은 1957년 5월 초동 서비스 공장에 중기 사무소를 내고 김영주에게 관리 책임을 맡기고, 구입한 장비와 부속품들을 수리, 조립, 개조시켰다.
그밖에 장비 부속품은 미8군의 모델이 바뀌어 시장에 내다 파는, 거의 신품에 가까운 것을 중간 상인들을 통해 저울로 달아 고철값에 구입하곤 했다.
정주영은 미군이 모델이 바뀌어 쓰지 못해 내다 파는 부속품에 맞는, 미군의 전 모델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54년부터 미국 원조 자금을 재원으로 전쟁 복구 공사가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했고, 예상대로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면서 고령교 공사를 마무리지어 준 성과도 신용 현대의 이미지를 쌓아 그 후 정부 발주 공사 수주를 쉽게 할 수 있는 결과로 나타나 주었다.
바야흐로 현대건설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 바로 한강 인도교 공사를 수주하고부터였다.

  현대시멘트 준공

단양 시멘트 공장 생산라인건설수요는 점점 늘어가는데 시멘트의 국내 생산량은 태부족이었다. 현대건설은 1962년 7월부터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현대건설이 굴지의 건설회사로 자리잡기는 했지만, 시멘트 공장을 짓는 일은 정주영에게도 커다란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착공에서 준공까지 24개월 동안 정주영은 매주 일요일이면 청량리역에서 중앙선 야간열차편으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지금도 생산되는 현대시멘트의 호랑이표는 이 시절 정주영의 일에 대한 집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젠가는 야간열차에서 깜박 잠이 들어 내려야 할 단양역을 지나친 적도 있었다. 놀라서 일어난 정주영은 그 길로 다음 역에서 내려 30리 밤길을 걸어 현장에 나타난 적도 있었다.
1964,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충북 단양의 현대시멘트공장 준공식에서매주 일요일마다의 현장 독려만으로도 모자라 정주영은 서울에서도 전화 질문을 해대곤 했는데, 담당자 아닌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가 정주영의 고함에 수화기를 그대로 던져버리고 밖으로 도망쳐버린 일도 있었다.
정주영이 현장을 뜨는 시간이면 직원 중에 누군가가 “공습경보 해제!”를 외쳤을 만큼 지독하고 치밀했다.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는 단양 시멘트공장은 예정 공기를 6개월 단축, 1964년 6월에 준공되었다. 그 후 1970년 1월 현대시멘트주식회사로 독립했고, ‘호랑이표’ 시멘트는 제품 원가 절감에 기여하며 빠른 시일 안에 최우수 업체로 자리를 굳혔다.

  드디어 해외 진출

해외로 나가는 정주영현대건설을 주축으로 우리나라 건설 현장에서 입지를 굳힌 정주영은 이제 해외 진출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가지만 해도 국내 업체들끼리의 피말리는 수주경쟁에는 늘 뒷말이 따랐다. 권력과 결탁해서 공사를 따냈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던 정주영은 웬만큼 견실해진 회사를 바탕으로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고령교 복구 공사 때 입은 타격으로 회사가 무너지다시피 한 위기를 겨우 헤쳐 나올 무렵, 4ㆍ19로 새 정부가 들어서자 부정 축재다, 정경 유착이다로 또 곤욕을 치러야 했다.
민간 자본이나 민간 기업이 별로 없었던 그 시절, 큰 공사는 으레 정부 발주 공사인지라, 큰 건설업자는 정부를 끼고 치부한다 해서 덮어놓고 신문과 항간의 구설에 오르내리곤 했던 것이다.

정주영은 자력으로 컸다는 평가를 받고 싶었다. ‘정권과 결탁’ 운운하는 사회와 여론의 오해가 싫었던 것이다. 게다가 해외 진출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건설기업은 조만간 벽에 부딪칠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현장65년 9월 태국(泰國)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공사를 현대가 수주한 것은 우리나라 건설업 사상 획기적인 전기로 받아들여진다.
서독, 이탈리아, 덴마크 건설업자들이 이미 진출해 있던 태국 현장에, 우리나라의 현대건설이 투입한 장비는 대부분 국내 도로 공사에 사용하던 재래식이었다. 최신식 장비를 구입해 봐도 사용 방법을 모르는 기능공들이 두 달도 못 되어 고장내기 일쑤였다.
그러나 정주영은 갖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진동식 롤러, 컴프레서, 믹서를 직접 만들어 썼고 시멘트 싣는 차도 만들어 썼다. 비록 초보적인 장비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현대가 해외건설에 대해서 자신감을 갖게 한 출발점이 되었다.

  죽음을 무릅쓴 월남의 해외 공사

월남 캄란항 공사1966년 1월, 현대건설은 월남전이 한창이던 캄란만 군사기지 건설 공사에 참여했다. 첫 해외 진출인 태국에서는 적자를 보았지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공사에부터는 해외건설에서도 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캄란만에는 우리나라의 현대건설 이외에도 미국, 호주, 싱가포르, 대만, 일본, 프랑스 등 스물 한 척의 준설선이 바다를 메운 채 공사에 여념이 없었다. 현대건설은 불과 2천5백5십 마력짜리 준설선 한 척인 현대 1호로 호주 등 3개 국이 완공을 못 보고 지지부진하고 있던 공정을 떠맡아 예정 시한에 맞춰서 완공했다.
이때 예기치 않던 사건이 일어났다. 메콩강 삼각주 하구를 준설하던 미국 준설선 8천 마력짜리 자메이카호가 베트콩이 장치한 폭발물에 의해 침몰당하게 된 것이다.
메콩강 삼각주를 뒤덮고 있는 수풀을 메콩강에서 준설한 토사로 묻는 작업은 월남전에 참전한 미국으로서는 작전상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는데, 이 작업을 하던 준설선이 침몰해버린 것이다.
이런 위험한 전쟁의 한복판으로 투입될 준설선으로 현대 1호가 지목된 것은 아무래도 달갑잖은 일이었다. 그러나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총을 들이대고 공사를 강요하는 데는 배겨낼 재주가 없었다.
숲에는 베트콩이 스물네 시간 잠복해 있었고 밤이면 조명탄이 연달아 터졌다. 그 와중에 정주영이 이끄는 현대건설은 메콩강 토사를 퍼올려 주변 숲을 덮어야 했다. 베트콩의 구정 공세도 겪으면서 1년 반 만에 이 공사를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월남에서의 준설 공사 경험은 70년대 중반 현대가 중동으로 진출해서 대규모 준설업자로 성장, 발전하게 한 초석이 되었다.

   1967년 소양강 다목적 댐 건설 (1)

소양강 댐 공사 현장 회의오늘날 현대가 성장하게 된 정신적인 밑받침이 정주영의 개인적인 인생 철학에서 비롯된 것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근검절약 정신을 바탕으로, 무모하리 만치 밀어붙이는 도전 정신으로 이제까지의 현대를 일구어 왔다면, 세계로 커가는 현대를 만들어준 원동력은 6·25전쟁의 와중에 생겨난 그의 또 다른 철학이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나라와 더불어 발전하는 회사’라는 인식이다.
만일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오늘까지 왔다면 지금의 ‘현대’만큼 성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소양강 다목적 댐 건설 공사였다.
이 공사에서 정주영은 우리나라 건설 공사 사상 유례 없는 또 하나의 선례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바로 대안 공사라는 것이다. 즉, 발주자 쪽에서 원하는 것보다 더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발주자를 설득, 서로의 이익을 증가시키는 방법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한국적인 풍토에서 이것은 자칫 커다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건방진’(?) 발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 제시를 통해 발주자에게 돌아가는 이익을 생각한다면 정주영이 이끄는 현대가 오늘날 성장하게 된 정신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정부도 1977년부터는 현대가 선례를 만든 이 방식을 통해 예산 절약을 할 수 있게 되었던 만큼, 정주영과 현대가 우리 경제 전반에 끼친 공로는 결코 만만하게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1967년 건설부는 소양강의 상류를 막아 대규모의 댐을 건설하기로 하고 입찰에 붙였다. 현대에게 낙찰된 이 공사는 처음에 콘크리트 댐으로 설계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공사는 대일 청구권 자금이 일부 투입되는 것이어서 일본공영이라는 회사가 설계에서 기술, 용역까지 맡게 되었다. 일본공영은 댐에 관한 한 회장부터 그 아래 사장, 부사장이 전부 세계적인 권위자로 뭉쳐진 회사였다. 댐 건설에 대한 기술 축적이 보잘것 없었던 정주영과 현대로서는 그들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처지였다.

  소양강 다목적 댐 건설 (2)

사력 댐으로 건설되는 소양강 댐일본공영측의 설계대로 공사를 진행한다면 댐 건설에 들어가는 돈은 고스란히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받아내는 대일청구권 자금을 도로 그들에게 돌려주게 되는 셈이다.
정주영은 고민에 빠졌다. 일본으로 돈이 건너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댐 건설 현장인 오지까지 막대한 물량의 시멘트니 철근 등의 수입 건설 자재를 운반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대로 공사를 하다가는 현대건설이 떠 안을 손해가 눈앞에 훤히 보였다. 이 공사를 낙찰 받은 것은 전혀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정주영은 소양강 댐이 들어설 자리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자갈과 무진장한 모래를 떠올렸다. 주변에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흙과 모래, 자갈을 이용해서 사력(砂礫) 댐으로 만드는 것이 콘크리트 중력 댐보다 훨씬 경제적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정주영은 즉시 콘크리트 댐을 어스(earth) 댐인 사력 댐으로 설계를 바꾸라고 지시했다. 그때 현대건설은 이미 프랑스 사람이 설계했던 태국 ‘파손 댐’ 건설에 입찰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콘크리트 댐, 사력 댐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설계 변경을 하느라고 자료를 모아보니 2차 세계대전 이후 1백미터가 넘는 댐은 대개 사력 댐으로 만드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했다.
정주영은 건설부에 사력 댐 대안을 제시했다. 그때까지는 일개 건설업자가 정부 발주 공사에 대안이라는 것을 내놓은 전례가 없었다.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일을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건설업자의 기본 자세였던 것이다.
그런데 세계 굴지의 댐 건설 회사인 일본공영의 설계안에 일개 청부업자가 대안을 제시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관(官)의 권위를 무시당했다는 반감으로 관은 펄펄 뛰었고, 세계 굴지라는 자부심이 정면 도전을 당한 일본공영도 가만 있지 않았다. 온갖 모욕이 정주영에게 퍼부어졌다.

  소양강 다목적 댐 건설 (3)

1967년, 소양강 다목적 땜생각하기조차 싫었던 그 수모를 받고 나서, 정주영은 이 일을 제쳐놓고 다른 일에 매달려야 했다. 피치 못할 술자리가 많았던 정주영이 위경련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공영의 구보다 회장과 하시모토 부사장이 병문안을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연락을 받고 나서 곧바로 퇴원해, 사무실에서 이들을 맞았다. 수모까지 받았는데 병원에 누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자존심이었다.
팔십이 넘은 구보다 회장은 정주영의 사무실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이마가 땅에 붙게 절을 하며 사과를 했다. 일본공영측에서 다시 계산을 해본 결과, 역시 사력 댐이 경제적인 측면에서나 안전도 면에서나 훨씬 유리하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주무부서도 일본공영도 태도가 이처럼 백팔십도 달라진 것은 건설부장관의 보고를 받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결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정주영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사력 댐으로 바꾸자는 정주영의 대안을 완전히 봉쇄해버리기 위해서 건설부장관이 먼저 박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정주영이라는 사람이 소양강댐을 사력 댐으로 설계 변경해야 한다고 떠들고 다니는데, 그 사람 말대로 했다가는 큰일납니다, 각하. 강바닥에다 흙, 모래, 자갈로 댐을 건설하다가 몇 년이나 걸리는 공사 중간에 큰 홍수라도 나 터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춘천시가 잠기고 서울이 잠기고, 그렇게 되면 정부가 흔들리고 난리 납니다.”
장관의 말을 들은 박대통령은 이렇게 반문했다.
“장관 말대로라면, 그럼 콘크리트 댐을 완성한 다음에 몇 십억 톤의 물을 가둬 놨을 때 만약 북한에서 폭격으로 댐을 깨뜨린다면 어떻게 되는 거요? 내 생각으로는 건설 중에 홍수에만 잘 대처하면 사력 댐이 더 유리하오. 흙, 모래, 돌로 댐을 쌓아놓으면 포에 맞아도 펄썩했다가 도로 주저앉으면서 흙만 좀 튀어 오르지. 산을 폭격하는 거나 같거든. 그럼 댐이 무너지지는 않을 거요. 폭격 끝나고 재빨리 손만 좀 보면 되고, 홍수 때만 잘 대비해서 완성만 시켜놓으면 콘크리트 댐보다 사력 댐이 오히려 발뻗고 잘 수가 있단 말이오. 그러니 다시 한 번 철저하게 검토해 보시오.”
결국 소양강 다목적 댐은 정주영이 제시한 대안으로 바뀌어 30% 가까운 예산을 절감했다.

  정주영과 경부고속도로 공사 (1)

영동고속도로 현장에서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공사였다. 정주영은 이 고속도로 건설의 초창기부터 중요한 역할로 참여를 했다. 공사 시작 전 타당성 검사를 할 때부터 무모한 공사이며 시기상조라는 온갖 비난을 받아가며 성사시켰던 것이다.
현대건설은 서울에서 오산까지의 1백5킬로미터, 대전에서 옥천까지의 28킬로미터를 합쳐 전구간의 5분의 2만을 담당했지만, 경부고속도로 전체가 완공되기까지 그의 정성과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정도였다.
제2차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려는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을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드는 비용을 산출해 보도록 지시했다.

물론 관련부처에도 같은 지시가 내려졌지만,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라 올라온 보고서가 제각각이었다. 건설비 산출액은 건설부 6백5십억원, 서울특별시 1백8십억원, 육군공병감실 기권, 현대건설이 3백8십억원이었다. 정주영은 태국 고속도로 건설 경험으로 물량 소요 산출에 자신이 있었고 5만 분의 1 등고선까지 조사했기 때문에 실물 측량과는 약간 차이가 있겠지만 거의 정확한 것이었다. 또 태국의 예를 근거로 했으므로 기본 공사 시방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기관에 따라 엄청나게 들쭉날쭉한 건설비 책정을 검토한 박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 경험을 가진 현대건설의 안에 가까운 4백3십억 원으로 총 건설비를 책정했다.
큰일을 할 때는 언제나 그렇듯 물론 반대론자나 신중론자가 나타나는 법이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정주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국에서의 경험과 토목 기술자로서의 정주영을 박대통령은 신뢰했고, 그 신뢰가 정주영의 의지를 확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정주영과 경부고속도로 공사 (2)

완공된 경부고속도로1968년 2월 1일, 우여곡절 끝에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을 가졌다.
박대통령도 정주영도 흥분과 감동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고속도로 공사비 책정이 아무리 빠듯해도 기업을 하는 정주영으로서는 이익을 남겨야 했다. 그런데 탈법이나 부실공사를 하지 않으면서도 이익을 남기는 방법은 공사 일정 단축밖에 없었다. 공사기간 단축 자체가 곧 돈인 것이다.
그러자니 우선 공사를 기계화해야만 했다. 정주영은 당시로 보면 천문학적이랄 수 있는 8백만 달러 어치의 중장비를 도입했다. 그 무렵 우리나라 총 중장비가 1천4백 대 정도였는데 고속도로 공사를 위해 그가 들여온 중장비가 1천9백 대였다. 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