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4월, 정주영은 크나큰 시련을 맞게 되었다. 조폐공사에서 발주한 동래의 건설현장과 함께 시작된 고령교 복구 공사에서 엄청난 적자를 기록, 현대건설은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고령교는 대구와 거창을 잇는 교량으로 지리산(智異山) 공비 토벌을 위해 복구가 시급한 처지였고, 그때까지의 정부 발주 공사로는 최대 규모였다. 처음에 정주영은 이 공사에 큰 기대를 걸었었다. 그러나 공사는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교각은 기초만 남아 있고, 파괴된 상부 구조물이 그대로 물에 잠겨 있어 말이 복구 공사지 오히려 신축 공사가 더 쉬울 판이었다. 게다가 투입할 수 있는 장비라고는 20톤짜리 크레인 한 대, 믹서기 한 대, 콤프레셔 한 대가 전부였다. 그나마 대부분 인력에 의지한 원시적인 공사로 세워놓았던 교각이 홍수에 쓸려 사라지기도 했다. 결국 착공 후 1년이 지나도록 교각 한 개도 다 박아 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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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동안 물가는 120배로 엄청나게 올라버렸다. 어쨌든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조폐공사 동래 사무실과 건조실 공사는 7천만환의 막대한 적자를 보고 완공되었다. 미군 공사에서 알뜰하게 벌어 모은 돈을 조폐공사에 다 털어 넣다시피 해 완공한 것이다. 회사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공사장에서는 인부들이 ‘임금을 내놓으라’ 파업을 하고 가뜩이나 부진한 공사는 지지부진, 하루하루 지연되었다. 신용이 사업하는 사람의 재산이라고 생각한 정주영은 어차피 손해를 보는 일, 공사만이라도 계약기간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리저리 자금 조달을 위해 뛰어다녔다. 최대한의 힘을 동원한 결과, 남의 돈을 끌어들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생들과 최기호, 매제 김영주의 집까지 처분하기로 뜻을 모았다. 조상 차례 지낼 집 한 칸은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정주영은 집 대신 초동 자동차 수리 공장 자리를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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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물가가 엄청나게 뛰었기 때문에 가족들의 집을 팔고도 모잘라, 얻을 수 있는 빚을 다 끌어 모아야 했는데, 그 이자가 월 18퍼센트나 되어 1년이면 쓴 돈의 꼭 배를 이자로 내야 했다. 55년 5월 마침내 악몽의 고령교는 최악의 상황 속에 당초 계약 공기보다 2개월 늦게 완공되었다. 계약 금액 5천4백78만 환보다 많은 6천5백여만 환의 엄청난 적자를 보고서였다. 공사가 끝난 뒤에는 현장 장비를 철수시킬 기력도 없는 지경이었다. 빚쟁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동종업자들의 시기와 질시도 더욱 극심해졌다. 소학교밖에 안 나온 정주영이 공기가 2년이나 되는 장기 공사를 수주하면서 인플레 계산을 빼고 일괄 계약을 한 것이 실수라느니, 그 학력으로 인플레가 무엇인지나 알겠느냐느니 하는 개인적인 비난도 들어야만 했다. 정주영은 그러나 이런 비난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경험 부족으로, 우리나라의 형편없이 부실한 건설 장비로는 고령교 정도의 공사도 힘겹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실책이었다. 귀중한 경험을 한 셈이지만, 이때 얻은 빚을 갚는 데는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 | |